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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학으로 재즈 횡단하기] 재즈, 그게 뭐지?  
제목 [인문학으로 재즈 횡단하기] 재즈, 그게 뭐지?   2019-02-19


남예지


“재즈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대해 우리는 어떤 대답을 할 수 있을까. 한 인터넷 포털의 어학 사전에서는 재즈라는 검색어에 대해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에 걸쳐서 미국의 흑인 음악에 클래식, 행진곡 따위의 요소가 섞여서 발달한 대중음악. 역동적이고 독특한 리듬 감각이 있으며, 즉흥적 연주를 중시한다. 뉴올리언스 재즈에서 시작되어 스윙, 모던 재즈, 프리 재즈 따위로 발전하였다”라고 답한다.


재즈 연주자이자 교육자인 마크 그리들리(Mark C. Gridley)는 <재즈총론>에서 재즈는 수많은 종류의 음악들로 이루어져 있으므로 통일된 기준을 가지기는 어려우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부분의 재즈 스타일에는 즉흥연주와 재즈 스윙 필(Jazz Swing Feeling)이 있다고 말한다. 독일의 음악 저널리스트이자, <재즈북>의 저자인 요아힘 베렌트(Joachim Ernst Berendt)는 재즈를 설명하기 위한 특징적 요소로써 “스윙으로 정의되는, 특별한 리듬관계”와 “임프로비제이션의 역할로 인해 발생하는 음악의 자발성과 활력”, 그리고 “연주하는 재즈 연주자의 개성을 반영하는 프레이징 방식과 사운드”를 꼽고 있다. 인류학자인 존 스웨드(John Szwed)는 <재즈 오디세이>라는 저서의 서두에서 재즈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대해 “물어봐야 알 정도면 말해줘도 절대 모를 거요”라고 답한 루이 암스트롱의 이야기를 언급하며, 재즈란 다른 음악과 달리 정의 자체를 거부한다고 말한다. 다만 저서의 본문에서 반복하여 즉흥연주에 대해 언급하고 있는 것으로 미루어 볼 때, 그가 재즈라는 음악 장르에서 즉흥연주를 굉장히 중요시하고 있다는 점을 짐작해볼 수 있다.





자, 이제 우리는 “재즈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대해 공통된 언어로 답을 하기는 어려우나, 재즈의 주요한 양식으로써 즉흥연주(Improvisation)를 포함하는 것에는 아마도 이견이 없을 것이라고 확신해볼 수 있겠다. 베렌트에 따르면 “재즈에는 임프로비제이션이 있다”는 사실이 널리 알려진 공리(公理)이기 때문에 다수의 사람들이 즉흥연주가 포함되어 있지 않은 곡은 재즈가 아니라 판단한다고 한다. 재즈의 정의와 관련하여 ‘스윙’이란 단어도 자주 언급되고 있는데, 여기에서 말하는 스윙이란 우리가 일반적으로 말하는 스윙 재즈나 스윙 리듬에서의 그것보다 좀 더 거시적인 관점에서의, 다시 말해 연주자 상호 간의 리듬적인 ‘관계’에 대해 말하고 있는 개념이다. 즉흥연주가 진행되는 과정에서 연주자들이 음악적으로 소통하고, 교감하여 각자의 리듬 세계를 하나의 방향으로 통합해가는 과정으로, ‘그루브’(Groove)와 유사한 개념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러므로 리듬적 관계로써의 스윙은 결국 재즈의 즉흥성에서 기인하는 요소가 된다.


그렇다면 즉흥연주라는 양식은 오직 재즈에서만 나타나는 독특한 요소일까? 그런 것은 아니다. 재즈가 발생하기 훨씬 이전인 바로크 시대에는 즉흥연주가 연주자로서의 역량을 평가하는 중요한 척도였으며, 바흐가 남긴 <올바른 건반악기 연주를 위한 시론서>라는 저서에는 즉흥연주기법을 설명하는 부분이 따로 있다고 한다. 바로크 시대 이후로 즉흥연주의 비중은 점차 줄어들긴 하였으나, ‘카덴차’(Cadenza)라는 양식으로 그 흔적이 남아 있으며, 현대음악에 이르러서는 다양한 방식의 즉흥연주들이 행해지고 있다.


그렇다고 해도 바로크 시대 이후로 서양 고전음악에서 연주자들의 주요한 목표는 즉흥연주가 아니라 최대한 작곡가의 의도에 맞게 원곡 그대로를 연주해내는 것이었다. 예를 들면 서양 고전음악의 연주회에서 베토벤의 피아노 소나타 제14번 ‘월광’이 연주될 때, 관객들이 기대하는 것은 ‘베토벤이 직접 연주한 것만 같은 ‘월광’인 것이다. 이와 비교해 재즈는 악보의 재현(再現)이나 원곡자의 의도가 주요한 관심의 대상은 아니다. 재즈 연주자들의 목표는 다양한 표현방식을 통해 원곡의 규범을 위반하고 전복시키는 데에 있다. 다시 말해 베토벤의 ‘월광’을 재즈 연주자들이 연주하게 된다면 베토벤이 아닌 연주자 각자의 새로운 ‘월광’을 연주하게 되는 것이다. 원곡을 구성하고 있는 특정한 화성, 선율, 리듬 등은 그 곡이 존재하기 위한 하나의 규범이 되고, 그 규범을 최대한 지키는 것이 서양 고전음악의 연주방식이었다면, 재즈 연주자들의 즉흥성은 그 규범에서 될 수 있는 한 벗어나 새로운 변화를 만들어내는 것에 그 목적이 있다고 할 수 있다. 오직 위반함으로써 재즈는 그 존재의 의미와 가치를 갖게 되는 것이다. 재즈의 미학은 바로 이러한 지점에서 그 정체성을 찾는다.


가끔 재즈를 들어보고 싶은데 어떻게 시작해야 하느냐에 관한 질문을 받는다. 그럼 나는 이렇게 답한다. 우선 재즈를 전혀 모른다고 할지라도 한 번쯤 들어봤을 법한 유명한 재즈 스탠더드곡들, 예를 들면 ‘Fly Me To The Moon’이나 ‘Over The Rainbow’와 같은 곡을 음원 플랫폼이나 유튜브에 한번 검색해보시라. 상상 이상으로 많은 음악가들이 그 곡을 연주했다는 사실에 한 번 놀랄 것이고, 그 많은 음악 모두가 동일한 곡을 제각기 다른 방식으로 연주한 것이라는 사실에 다시 한번 놀랄 것이다. 이러한 방식의 청취가 익숙해진다면 좀 더 나아가 즉흥연주가 포함된 형태의 곡일 경우, 기존의 선율을 걷어낸 화성진행 안에서 연주자에 따라 얼마나 색다른 이야기들이 만들어지는지를 들어볼 수가 있다. 바로 이러한 부분들이 청취자로서의 우리가 재즈를 통해 누릴 수 있는 즐거움이 된다.


우리나라에서는 2010년대에 들어서면서 음악 관련 예능프로그램들이 앞을 다투어 생겨났다. 이와 함께 일어난 변화는 대중들이 가수의 ‘음악적 해석능력’에 집중을 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기존에 있던 곡을 다른 가수가 부를 때, 이제 더 이상 대중들의 평가 기준이 원곡에 있지 않다는 것이다. 얼마나 원곡의 가창과 비슷한지가 아니라, 원곡을 각자의 스타일에 따라 어떻게 ‘해석했는지’가 중요해진 것이다. 이러한 청취 방식은 위에서 언급한 재즈의 청취 방식과 분명히 맞닿아 있다. 그래서 나는 이와 관련해 감히 재즈의 ‘대중화’에 대해 기대해보는 부분이 조금은 있다.


아무튼 위와 같은 관점에서 보면, 재즈에서의 즉흥연주가 무(無)에서 유(有)를 창조하는 과정이라고 할 수는 없다. 연주자의 자유를 제한하는 원곡이라는 규범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이는 연주가 시작되기 이전에 연주자들 상호 간에 이루어지는 최소한의 합의라고도 할 수 있겠다. 화성진행이라든지 전체적인 리듬에 대해서는 연주자들의 사전 합의가 반드시 필요하며, 이는 구두로 이루어지거나 기존에 작곡 혹은 편곡되어있는 곡의 악보가 사용되기도 한다. 재즈에서 일반적으로 행해지는 재즈 스탠더드곡의 연주에서는 그 곡의 화성진행과 선율 자체가 큰 틀이 된다. ‘틀 안에서의 자유’, 이것이 재즈에서의 즉흥연주를 설명하는 가장 좋은 표현이 될 것 같다(이 기본적인 틀마저도 전복시키려 했던 프리 재즈를 여기서는 잠시 제외해 두기로 하자). 그러나 이는 어디까지나 연주를 시작하고 끝마치기 위한 ‘최소한의 약속’일 뿐, 연주가 진행되는 과정에서 변화의 가능성은 얼마든지 존재한다. 하지만 재즈 연주자들은 이 ‘최소한의 약속’이라는 것이 한 곡을 끝내고 다음 곡으로 무사히 넘어가기 위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 잘 알고 있을 것이다. 악보를 잘못 이해하거나, 타이밍을 놓쳐 영원히 끝나지 않을 것만 같은 연주를 해본 경험들이 있을 테니 말이다.


나는 꽤 오랜 세월 재즈 연주자로서 살아왔음에도 불구하고, 재즈가 과연 무엇인지, 재즈라는 음악이 다른 장르의 음악과 어떻게 다른지, 도대체 재즈 연주자들과 소수의 팬은 왜 재즈에 열광하고 있는지, 반대로 왜 대중은 재즈를 어렵고 지루하다고 생각하는지, 재즈라는 것이 이제는 음악 장르라기보다는 즉흥성에서 기인하는 일종의 하위문화로 인식해야 하는 것은 아닌지 등등에 대해 깊게 고민하기 시작한 것은 불과 최근 몇 년간의 일이다. 테오도르 아도르노(Theodor W. Adorno)라는 독일 출신의 철학자가 쓴 재즈에 대한 짧은 비평을 읽으며 한편으로는 동의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섭섭한 마음을 금치 못하며, 이에 대한 반론을 생각해내기도 하고, 텍스트 언어학에서 말하는 상호텍스트성(Intertextuality)이라는 개념이 소설이나 영화 관련 연구들에서 주로 다루어지고 있지만, 재즈에서는 콘트라팩트(Contrafact)나 릭(Lick)의 사용 등으로 인해 더욱 중요하게 다루어질 수 있는 개념이라는 생각, 구조주의와 언어학을 기반으로 한 정신분석학자였던 라캉의 이론에서 상상계와 상징계, 기표와 기의, 틈이나 공백과 같은 요소들이 재즈의 즉흥성을 다루는 데에 있어 얼마나 유용한 개념이 될 수 있는지에 대한 혼자만의 고뇌(?)들을 이 천금 같은 연재의 기회를 통해 조금씩 나누어 보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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