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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베이시스트 크리스찬 맥브라이드  
제목 [인터뷰] 베이시스트 크리스찬 맥브라이드   2019-02-13


인터뷰 이기준

사진 박승호


자유라는 이름으로 표현이 난무한 시대를 산다. 어리석고 초라하다. 음악도 다를 겨를이 없다. 소셜미디어에 길들어진 우리는, 더는 가슴 벅찬 마음으로 기다렸던 음반을 사고 내 방문을 살며시 잠그며 몇 달에 혹은 일 년에 한 번씩 치렀던 나만의 종교의식을 잃은 지 오래다. (요즘 이 종교의식의 일환으로 레코드붐이 일지만 과연 생명 없는 종교가 의미가 있을까?)


어떤 영역의 음악인지도 분간하기 어렵고 재즈라는 말을 꺼내기도 벅찼던 1998년에 나는,  대한민국에 지금의 재즈 마니아라면 이름만 들어도 익숙한 브래드 멜다우, 조슈아 레드맨, 크리스찬 맥브라이드를 잡지에 소개할 수 있는 호사를 누렸다.


1972년생인 크리스찬 맥브라이드는 이미 어릴 때부터 그가 태어나고 자란 필라델피아의 재즈 신동이란 말을 들었다. 17살에 바비 왓슨에게 처음으로 부름을 받은 이후, 22살이 되던 해까지 프레디 허버드, 베니 그린, J J 존슨, 로이 하그로브, 조슈아 레드맨, 브레드 멜다우 등과 연주했다. 1995년에는 자신의 그룹을 결성하여 데뷔 앨범 [Gettin’ To It]으로 자신을 세상에 알렸다. 이후 그는 많은 앨범 활동과 연주를 통해 꾸준히 자신의 음악을 이루어 가고 있다.


최근엔  NPR라디오와 Sirius XM라디오 <재즈 나이트 인 아메리카>(Jazz Night in America)의 호스트, 뉴저지 몽클레어 재즈 페스티벌을 주관하고 그의 부인 멜리사 워커(Melissa Walker)와 함께 비영리 단체 재즈 하우스 키즈(Jazz House Kids)를 운영하며, NJPAC(New Jersey Performing Art Center)의 예술감독, 뉴포트 재즈페스티벌의 아티스트 디렉터로 활동하고 있다. 그리고 지난해 발표한 그의 2번째 빅밴드 앨범 [Bringin' It]으로 바쁜 일상을 보내고 있는 베이시스트다.


지난 만남으로부터 20년이 지난 2017년 12월, 크리스찬 맥브라이드를 다시 만나 월간 <재즈피플>에 소개할 수 있는 영광을 얻었다. 세월에 묻혀 잊었던 어릴 적 이야기부터 그가 생각하는 음악과 재즈, 그래미 어워즈에 후보로 선정된 신보, 그가 사랑하는 베이스와 연주 스타일, 음악교육에 관한 견해와  평범한 일상생활에 관해 이야기를 나누었다. 20년 전, 우리는 재즈에 대해 왜 그렇게 심각했던가 하며 웃었고 이야기를 나누며 시간을 즐겼다. 인터뷰 중의 일부를 발췌하여 공유한다.




지금의 크리스찬 맥브라이드를 만들다


어떻게 베이스라는 악기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고, 연주자로 성장하는 데 도움이 된 것이 무엇이었나요.


아버지와 삼촌이 베이시스트였던 데서 영향을 많이 받았어요. 자연스럽게 악기에 관심을 가지면서 음악을 접하게 됐죠. 베이스를 처음 잡은 건 9살 때였어요. 처음에는 일렉트릭 베이스를 쳤어요. 다양한 음악을 듣고 제가 할 수 있는 것을 따라하면서 배웠죠. 중학생 때부터 많은 선생님을 만났고, 어쿠스틱 베이스를 연주하기 시작한 것도 그때예요. 그 당시에 받았던 개인 레슨이 정말 많은 도움이 되었어요.





그 이후에는 줄리아드음대에 입학했었죠. 그런데 1년 뒤에 중퇴를 했고요. 재즈 연주자여서 클래식음대가 잘 맞지 않았던 건가요.


1년만에 중퇴했던 건 사실, 일 때문이었어요. 중학생 때 재즈를 연주하면서 클래식도 병행했었어요. 15살 때 만난 윈튼 마살리스는 멘토이자 큰형 같은 존재였고, 고등학교를 졸업할 무렵에는 무조건 뉴욕에 가야 한다는 생각을 했었죠. 그런데 어머니는 제가 뉴욕의 그저그런 재즈 뮤지션이 되는 걸 원하시지 않으셨어요. 그래서 저는 뉴욕에 있는 맨해튼음대, 뉴스쿨, 줄리아드음대 중 하나에 진한해야 했죠. 줄리아드음대가 제 적성에 아주 딱 맞는 학교는 아니었고, 환경에 적응하는 시간도 필요했지만, 그곳에서 보낸 1년은 제게 많은 도전을 요구했어요. 저도 그 도전을 좋아했고요. 개인적으로 편하게 지내는 것보단 도전이 이어지는 걸 좋아하거든요. 그런 점에서 줄리아드음대에서 보낸 1년은 즐거웠었죠. 하지만 바비 왓슨과 연주할 기회가 생겼고, 로이 하그로브, 프레디 허버드 등 많은 연주자들과 함께하게 되면서 중퇴를 결정해야 했어요.




재즈 연주자로 살아야겠다고 결심하게 된 시점이나 계기가 있었을까요.


윈튼 마살리스를 만난 순간이었겠죠. 다양한 음악을 좋아했던 저는 그렇게 연주를 해왔어요. 하지만 윈튼을 만나고 저는 재즈에 집중하기로 결심했죠. 그 당시(1987년), 윈튼은 우리에게 재즈 아이콘이었어요. 당시 윈튼은 26살 정도였는데, 정말 굉장했어요. 지금도 그는 제 멘토이자, 많은 긍정적인 영향을 주는 음악가 중 한 명이에요.




윈튼 마살리스도 그렇지만, 맥브라이드 씨도 재즈 신동으로 이름을 날리며 어릴 적부터 많은 주목을 받았던 거로 기억해요. 두 분은 재즈를 대표하는 거장이 되었지만, 근래에 재즈 신동으로 주목을 받던 많은 연주자가 소리소문없이 사라지는 경우를 정말 많이 보게 됩니다. 이 현상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어느 시대에나 재즈 신동으로 불린 연주자들은 늘 있었죠. 8살이나 9살밖에 안 되는 어린 연주자가 놀라운 재능을 갖고 연주하는 모습을 지켜볼 수 있다는 것은 정말 흥미진진한 일이에요. 하지만 중고등학생 시절과 사춘기 같은 성장과정의 예민한 시간을 잘 조율하는 게 더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제 경험에 비춰서 설명할게요. 고등학생 때 가장 친한 친구는 조이 디프란세스코(Joey DeFrancesco)였어요. 조이는 재즈 신동이었어요. 필라델피아에서 조이는 9살 때부터 오르간 연주자로 재즈를 연주한 스타 중의 스타였어요. 발이 페달에 닿지도 않았지만요. (웃음) 하지만 그를 재즈 신동으로 기억하는 사람은 거의 없어요. 굉장한 아이였지만, 그가 다른 신동들과 달랐던 것은 그의 부모님이었어요. 그의 부모님은 그를 공립학교에 보냈어요. 조이에겐 그 나이대의 아이들이 절대 할 수 없는 음악적 재능이 있었지만, 다른 일반적인 아이들과 어울렸고 많은 친구를 사귀었어요. 부모의 과잉보호가 어린 연주자의 음악 재능을 저해할 수 있어요.


사실 문제는 시간이 지나면서 재능이 더 발전하느냐는 것이에요. 조이 알렉산더를 예로 들어볼게요. 정말 대단해요. 하지만 제 질문은 조이 알렉산더가 18살 때는 어떨까 하는 겁니다. 과연 그때도 사람들이 그의 연주에 지금과 같은 관심을 보일까요? 그에겐 자신의 트리오가 있지만, 다른 연주자들이 그와 함께 연주하기를 간절히 열망할까요? 그리고 녹음을 하자는 음반사의 제의가 들어오지 않아도 괜찮을까요? 나는 조이가 정말 잘 되기를 바라는 사람이에요. 하지만 그가 16살 혹은 18살이 되었을 때 어떤 재즈 연주자가 될지는 조금 더 지켜봐야 할 문제인 거죠.




맥브라이드 씨의 음악여정에서 잊지 못할 순간이 있었다면.


제가 프레디 허버드와 처음 연주했던 18살 때죠.




팻 메시니와도 연주하지 않았나요. 어떻게 만나게 된 건가요.


프레디 허버드를 통해서 만났어요. (웃음) 프레디 허버드 밴드가 보스턴의 레가토바에서 연주할 때 팻이 들어러 왔어요. 그때 처음 악수하며 인사했어요. 두 번째 만남은 1992년, 제가 조슈아 레드맨 밴드에 있을 때였어요. 저희가 팻 메시니의 피츠버그 공연 오프닝 무대에 섰을 때였죠.




첫인상은 어땠나요.


굉장히 친절했어요. 큰형 같았죠. 굉장히 지적이고 창조적인 아이디어와 지식으로 가득 찬 사람이에요. 같이 앉아서 무엇을 물어도 오래 대화할 수 있는 그런 사람이에요.




그가 바라보는 재즈


우리가 처음 만났던 게 1998년이니, 벌써 20년 전이에요. 아마 [Family Affair] 발표 직후였던 것 같은데.


확실히 기억하죠. 제가 경력을 쌓기 시작한 초창기 시절에 재즈 잡지 표지로 나온다고 해서 굉장히 놀랐던 기억이 나요. 그 이후 1999년에는 경제적으로 굉장히 어려운 시기를 겪었죠.




그렇다면 연주자로 살면서 힘든 순간은 또 언제가 있나요.


전반적으로는 괜찮은 편이었어요. 그런데 아마도 20년 전에 기준 씨와 인터뷰 한 다음 해인 1999년에 경제적으로 정말 힘들었어요. 연주도 잘 잡히지 않았고요. 전당포에 제 일렉트릭 베이스 두 개와 키보드까지 맡겨야 했죠.





그래서 말인데, 당시와 지금을 비교하면, 지금의 젊은 재즈 연주자들은 어떻게 다른 것 같나요.


(크게 웃음) 페이스북! 소셜미디어 덕분에 많은 것이 좋아졌지만, 동시에 많은 것을 망쳤어요. 소셜미디어를 통해 다시 채워지는 것도 많지만요. 과연 요즘 젊은 연주자들이 나를 비롯해 제임스 카터, 마크 위트필드, 그렉 허처슨, 로이 하그로브 같은 중년의 재즈 연주자들과 함께 시간을 보내고 싶어 하는지 잘 모르겠어요. (인터뷰어 주/ 크리스찬 맥브라이드는 이 음악가들이 50년대 재즈를 새롭게 재창조하는 세대라고 정의했다.) 과거에 프레디 허버드, 조 헨더슨, 토미 플라나건, 앨빈 존스, 아트 블레이키, 베니 카터 등의 거장 연주자들은 당시 젊은 연주자들이 자신의 음악을 좋아하고 관심 있어 한다는 사실에 기뻐했었죠. 20대 초반이었던 저희는 시간이 허락하는대로 그들에게 접근해 더 많은 정보과 노하우를 배우려고 노력했어요. 어떻게해서든 함께 시간을 보내려고 했죠. 레이 브라운이나 론 카터가 뉴욕 근방에 올 때마다 저는 그들을 보러 갔고, 제가 얼마나 그들의 음악을 존경하고 관심이 있는지 내비치려고 했어요. 그들의 음악과 연주에 대해 기회가 될 때마다 질문을 던지고 더 알아내려고 했었죠.




그렇다면 이렇게 질문을 해볼게요. 만약 맥브라이드 씨가 2017년 12월 현재, 30세 이하의 젊은 연주자라면 재즈 대가들과 시간을 보내겠다는 갈망이 있을까요. 아니면 자신의 음악을 만드는 데 더 시간을 투자할까요.


모두가 자기 음악을 만들어서 보여주기에 바빠요. 누군가 제게 제 밴드를 만들어 제 음악을 보여줄 것인가, 아니면 칙 코리아와 투어를 할 것인가를 묻는다면, 저는 제 것을 포기하고 칙 코리아를 택할 거예요.




재즈 거장들을 비교하고 평가한다는 것 자체가 우스꽝스러운 일이지만, 맥브라이드 씨의 관점에서 래리 브라운과 폴 체임버스, 스콧 라파로와 게리 피콕 등을 이야기한다면.


연주할 때 레이 브라운의 비트는 일반적인 베이시스트들보다 더 묵직하다고 할 수 있어요. 조금 더 민다고 해야 할까요. 폴 체임버스는 흔들림 없이 정확한 게 장점이에요. 예를 들어 폴 체임버스가 정속주행을 한다면, 레이 브라운은 항상 발을 패달 위에 놓고 약간 힘을 주며 지그시 밟는 식으로요. 이 둘의 공통점이라면 모두 대단한 멜로디 아이디어와 그들만의 아름다운 소리를 만들어낸다는 것이죠.


사실 저는 게리 피콕보다는 스콧 라파로에 관해 더 잘 알아요. 스콧 라파로는 베이스에 혁명을 가져온 연주자라고 할 수 있어요. 좀 엉뚱하게 들릴지도 모르겠지만, 그에겐 굉장한 그루브가 있어요. 저는 개인적으로 그가 빌 에반스와 연주했던 것보다 햄프턴 호스와 함께했던 앨범 [For Real]을 더 좋아해요. 빌 에반스와 함께했을 때보다 더 의미 있는 연주를 했다고 생각하거든요.




요즘 심심치 않게 듣는 이야기 중 하나가 ‘재즈가 죽어가고 있다’라는 거예요.


그 말을 60년 동안 해왔죠. (웃음) 60년대 초, 아니 50년대 말부터요. 로큰롤이 등장하면서 계속했던 말이에요. 60년대 중반 소울이 음악계를 주도했을 때도 그랬고, 록 스타가 주류를 이뤘던 70년대에도 그랬고요. 만약 그때부터 재즈가 죽어가고 있었다면 지금 이미 죽었어야 하는 거 아닌가요. (웃음) 어떤 환경에서 어떤 팝 문화가 있었든 간에 재즈는 언제나 공존했어요. 거장들은 항상 자리에 있었고, 음악은 진화했죠. 재즈는 죽지 않아요.




그렇다면 현재의 재즈는 어디를 향하고 있을까요.


음, 그런 생각을 하는 건 재미가 없어요. 어디로 가는지 누가 알까요? 좋아하는 음악을 연주하고, 자신이 속한 환경에서 좋은 연주자들과 함께 음악을 만들어내는 것이 중요해요.




재즈 교육에 대해 이야기해볼게요. 최근 재즈 교육이 잃고 있는 것이 있다면.


재즈가 어디서 어떻게 시작되었는지가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가장 밑바닥에서 탄생한 천재적인 음악이에요. 이 음악의 중심은 길거리였고, 이 음악의 중심은 흑인 사회였다는 사실이에요. 많은 순간, 이 음악은 근원에서 멀어지고 있어요. 이 음악의 태생은 별거 없는 이웃집 친구 같은 친근한 음악이에요. 지금 재즈 씬에는 정말 천부적이고 재능이 뛰어난 재즈 음악가가 많지만, 그들이 들려주는 음악은 제가 재즈를 처음 듣고 접했던 때의 음악과는 느낌이 사뭇 달라요. 더 이상 이웃집 친구 같은 재즈가 아니에요. 요즘의 재즈 교육은 너무 깔끔하고 깨끗해요.




재즈의 역사를 통해 배울 수 있는 기본적인 전통조차도 깨지고 있다는 느낌도 듭니다.


정말 좋은 학교로 진학하는 농구 유망주도 가장 기본적인 드리블이나 패스를 연습합니다. 무용수는 학교에서 아주 기초적인 동작과 스트레칭을 배우죠. 그런데 재즈는요? 무엇이 가장 기본적인 것인지조차도 모를 정도로 스스로 질문하게 해요. ‘재즈를 하는 데 꼭 스윙을 할 필요는 없어!’, ‘블루스를 연주하는지 꼭 알아야 할 필요는 없어!’, ‘그저 창의적으로 하라고!’ 같은. 이건 정말 위험한 발상이에요.


여기에는 재즈라는 음악을 연주하기 위해 가장 기본적인 것을 반드시 알 필요는 없다는 생각이 깔려 있어요. 어떻게 기본적인 재즈곡을 연주하지도 못하면서 재즈 연주자라고 할 수 있겠나요. 어떤 학교의 재즈 과정에는 재즈곡을 가르치지 않는 곳도 있다고 해요.




그런 관점에선 맥브라이드 씨의 부인이 운영하시는 비영리 단체 ‘재즈 하우스 키즈’는 의미가 클 것 같아요. 어떻게 시작한 건가요.


멜리사는 재즈 싱어예요. 이 단체는 15년 전, 뉴저지에서 시작했어요. 근처 공립학교에서 멜리사에게 학교에서 음악 워크숍이나 마스터클래스를 운영해달라고 한 게 시작이었죠. 여기저기에서 요청이 많아지면서 아예 우리가 비영리 단체를 만들어 학교에 음악 프로그램을 제공하며 도움을 줄 수 있게 됐어요. 미국 문화의 한 부분을 전달하는 데 노력하고 있어요. 굉장히 자랑스럽게 생각해요.




그런데 음악가로 살면서 좋은 남편으로서 가정생활을 병해하기가 쉽지는 않을 것 같네요.


노력은 해요. 하지만 그 부분에는 좋은 점수를 줄 수 없어요. (웃음) 정말 많이 부족하지만, 하나 다행인 것은 아내와 수시로 통화하고, 연락한다는 것이에요. 그래서 상대방이 지금 무엇을 어디서 하고 있는지를 알고 있죠. 항상 가까이 있으려고 노력해요. 아무리 긴 투어 일정이 있어도, 그녀가 염려하지 않도록 시간이 날 때마다 연락하고 안부를 확인하죠.




그럼 그런 일정이 없을 때 집에서는 어떤 일과를 보내시나요.


(웃음) 조금 창피한데요. 대개 11시 정도에 일어나서 체육복을 걸치고 집 지하 사무실에서 이메일을 확인해요. 그 뒤에는 온종일 TV를 보죠. 집안을 돌아다니다가 피아노도 조금 치고요.




크리스찬 맥브라이드의 음악세계


최근에 앨범을 발표했죠. 빅밴드 앨범 [Bringin’ It]이에요. 어떤 의미의 제목인가요.


글쎄요. 특별한 의미라기보다는 요즘 세대의 캐치프레이즈 같은 거라고 할까요. ‘네가 가진 모든 것을 보여줘’ 같은. 운동선수들이 많이 사용하는 표현이죠.




앨범의 첫 곡 ‘Getting To It’이 제임스 브라운의 ‘Get It Together’와 비슷하다는 이야기가 있어요.


맞아요.




곡을 그대로 따온 건가요.


같은 베이스라인에 기타 리프 정도. 베이스는 근음만 가져왔어요. (웃음) 제임스 브라운의 그루브에 새로운 멜로디를 붙였어요.




그러고 보니, 제임스 브라운과 할리우드 볼에서 공연도 함께했었는데 어떠셨나요.


그 공연도 제 인생에서 빼놓을 수 없는 순간이죠.




어떻게 만난 건가요.


11살 때 그의 콘서트에서 그를 처음 봤어요. 공연 후 백스테이지에서 처음 만났죠. 그다음은 1994년 아폴로극장 공연 후 백스테이지였죠. 아마 제임스 브라운의 네 번째 아폴로극장 라이브 앨범으로 나왔을 거예요. 그다음은 1995년에 제 첫 앨범을 발표한 후였어요. 그때 제임스는 마치 제가 누군지 알고 만난 듯했어요. 그리고 그의 초대로 1997년 처음 그와 함께 연주했어요. 매해 그의 생일에 맞춰 열리는 올스타 파티 공연에서 많은 이들과 함께했죠. 아마 그는 제가 그곳에 있었는지도 잘 몰랐을 거예요. 그리고 2006년 9월, 그와 한 무대에서 베이스를 연주하는 영광을 누릴 수 있었죠.





다시 앨범으로 돌아가 보죠. 이번 빅밴드 앨범에 콘셉트가 있나요.


어떠한 특별한 콘셉트를 염두해 두고 앨범을 만들었다기보다는 편곡자로서 조금 더 발전하고 싶은 마음이 있었어요. 빅밴드는 제게 실험실이나 학교의 교실 같은 느낌이에요. 그 안에서 다양한 공구를 활용해 무언가를 만들어내죠. 특별한 콘셉트가 있었던 건 아니에요.




빅밴드 편곡을 하게 된 계기는.


윈튼 마살리스 때문이에요. (웃음) 1995년에, 윈튼은 자신이 맡고 있는 링컨센터 재즈 오케스트라를 위해 뭔가 써보라고 했어요. 그때까지 저는 빅밴드를 위해 곡을 써보거나 편곡해본 적이 없었어요. 그런데도 윈튼은 저를 믿어줬죠. 대단한 편곡을 하진 않았고, 3~4개의 관악기를 편곡하는 것으로 시작했어요. 그때 음악을 정말 귀 기울여 들으며 공부해야 했어요.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었죠.




제가 알기론 맥브라이드 씨는 많은 편곡자 중에서도 올리버 넬슨에게서 많은 영향을 받은 것으로 알아요. [Bringin’ It]을 들어보면 올리버 넬슨뿐만 아니라 마리아 슈나이더의 영향도 느껴져요. 그들이 편곡자로서 갖는 특별한 가치가 있다면.


여러 명의 뮤지션의 소리가 구분되도록 만들 수 있는 사람이라면 어떤 편곡자가 되었든 간에 존경하게 돼요. 트럼펫 넷, 트롬본 넷, 목관악기 넷 모두를 본래 가지고 있는 소리보다 더 풍성하게 만들어낸다는 건, 정말 놀라운 능력이에요.




맥브라이드 씨는 빅밴드를 지휘하면서 베이스를 연주하는 다른 능력이 있죠. 조금 불편할 것 같기는 한데요.


그게 좋은 아이디어는 아니라는 생각을 가끔 해요. (웃음) 존 클레이튼(베이스)는 제가 좋아하는 밴드리더 중 한 명이에요. 제가 처음으로 클레이튼 해밀튼 오케스트라를 보았을 때 그는 연주하지 않고 지휘만 했어요. 저는 그에게 가서 왜 연주도 하지 않느냐고 물었더니, 빅밴드를 지휘하며 연주하는 것이 어렵다고 하더라고요. 그때 저는 충분히 할 수 있다고 자신 있게 말했는데... 그가 한 말이 어떤 의미인지 지금은 이해해요. (웃음)




많은 것을 이루었고, 거물이 된 지금의 맥브라이드 씨에게 영향을 주거나 도전을 하게 하는 사람이 있나요.


여러 방면으로 절 발전하게 하는 사람은 너무나 많아요. 윈튼도 그중 한 명이죠. 아직까지도 많은 영감을 주는 사람 중의 한 명이에요. 전 최근 5년 동안, 베이스 연주가 아닌 다른 일들을 시작했어요. 두 개 의 라디오 방송과 재즈페스티벌 디렉터 등 베이스와 상관없는 이들을 하면서 저와 다른 분야의 사람들과 시간을 보내게 되었죠. 그중 한 명인 조지 윈이(재즈 프로모터)는 제가 많은 정보를 제공해주는 사람이에요. 그의 조언과 경험은 제게 새롭게 맡은 일을 해가는 데 많은 도움과 영감이 됩니다. 그리고 ‘재즈 하우스 키즈’를 운영하는 제 아내 멜리사 워커도 제게 많은 영감을 줘요. 그 일을 어떻게 꾸려가는지 감탄하지 않을 수 없죠.




공연 때 사용하는 일렉트릭 베이스가 플랫리스 메이플 넥으로 알고 있습니다. 선호하시는 특별한 이유가 있나요.


메이플 넥 베이스에는 정교함이 있어요. 마쓰히노가 제 모든 일렉트릭 베이스를 만들었는데, 모두 메이플 넥이에요. 1997년에 제가 그에게 처음 메이플 넥을 주문했을 때, 아무도 메이플 넥으로 주문한 적이 없었다며 눈을 크게 뜨고 쳐다봤던 기억이 나요. 많은 사람은 메이플 넥으로 만들면 악기나 소리에 여러 문제가 있을 거라고 말했죠. 하지만 그런 일은 없었어요.




어쿠스틱 베이스에 핑거보드를 높은 위치에 놓는 걸 선호하시나요. 아니면 낮은 위치를 선호하시나요.


저는 중간인 것 같아요. 너무 높거나 낮은 걸 좋아하지 않아요. 현이 날씨에 쉽게 영향을 받기 때문에, 조금이라도 달라지면 많은 영향을 끼쳐요.




자신의 베이스 스타일을 정의한다면.


그겐 제 몫이 아니에요. 제 음악을 듣는 사람들이 결정할 문제죠. (웃음)




조금 추상적인 질문입니다. 맥브라이드 씨에게 음악이란.


음악은 소통하는 하나의 방법이어야 합니다. 말하는 것의 다른 방법일 수도 있고요. 감정을 표현하는 다른 방법일 수도 있겠죠. 우리가 삶에서 겪는 모든 것들을 비춰주는 거울일 수도 있겠네요. 소리로 표현되는 삶. 아마도 그게 아닐까요.




음악을 공부하거나 감상할 때, 머리로 이해하고 분석하는 게 먼저인가요, 아니면 마음으로 느끼는 게 먼저인가요.


우선 그렇게 깊게 생각하는 사람이 많을지가 의문이네요. 대부분의 사람은 매일 반복되는 그들의 일상에서 벗어나길 원한다고 생각해요. 그래서 많은 사람은 음악은 술이나 맛있는 사탕처럼 그저 기분을 좋게 만드는 도구 정도로 생각해요. 하지만 만약 아티스트가 되길 원한다면, 이 질문은 계속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자신의 깊은 음악적 소양을 위해 이 질문은 반드시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음악을 업으로 삼기 위해 경력을 쌓는 음악가에게 조언을 한다면.


자신에게 가능한 최상의 음악가가 되기 위해 나아갈 수 있어야 합니다. 많은 음악가가 음악을 상업적인 차원에서 생각할 때쯤 추구하는 성공은 다수가 좋아하고 공감하는 그 무언가입니다. 앨범을 몇 장 팔았고, 얼마나 큰 무대에서 연주를 하느냐는 식이죠. 그저 자신에게 진실한 음악을 하라고 말하고 싶어요. 그것을 계속해서 할 수만 있다면 성공한 음악가입니다. 나는 팝 스타들이 애처로워요. 그들의 경력이 18살 아이들이 선호하는 음악에 좌지우지된다는 사실이 별로 유쾌하진 않거든요.




연주나 작곡을 할 때 매너리즘에 빠지거나, 어딘가에 빠져나오지 못하는 것 같아 힘들 때가 있나요.


항상 그렇죠. (웃음) 사실, 무언가를 만들어낸다는 것에는 고통이 수반돼요. 가끔은 잘 안 풀릴 때가 있죠. 어젯밤 빌리지 뱅가드에서의 연주에서도 약간 그런 기분이 들었어요. 다들 좋아했지만, 저는 만족스럽지 않았어요. 전 제 최선을 다했는데도, 왜 그런 기분이 들었는지 잘 모르겠더라고요. 조금 힘들었어요.




베이시스트로서 반드시 들어야 하는 앨범이 있다면.


몇 개를 추릴 수가 있을까요? 레이 브라운, 론 카터, 자코 파스토리우스가 연주한 모든 앨범과 모든 모타운 레코즈 앨범을 다 들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연습을 매일 하시는지 궁금하네요. 연습할 때 가장 먼저 하는 것은.


스케일 연습으로 손을 풀어요. 날마다 늘 다르지만, 중요한 건 하루도 빼놓지 않고 연습해야 한다는 사실이에요. 한 번은 아내와 10일 정도 여행을 가기로 했는데, 일부러 악기를 두고 갔어요. 그때 확실히 알겠더라고요. 매일 빠짐없이 연습을 해야 한다는 것을요. 우리가 간 곳이 어느 섬이었는데, 거긴 음악가도 없더라고요.




조금 민감한 질문입니다. 당신은 성공한 음악가인데, 혹시 그 과정에서 피부 색깔 때문에 불이익이 있거나 하지는 않았나요.


제가 확연히 느낄 만한 일은 없었어요. 얼마 전에 제가 퀸시 존스의 집에 갈 기회가 있었어요. 그때 제가 비슷한 질문을 했어요. “퀸시, 당신은 흑인 음악가로는 할리우드에서 성공한 유일한 재즈 음악가이고 흑인으로는 유일하게 머큐리 레코즈에서 부사장으로 있었는데, 괜찮았나요?”


그때 그는 “내겐 목표가 있었기 때문에 누가 내게 어떤 말을 하고 어떤 행동을 하든지 개의치 않을 수 있었어”라고 했죠. 저는 자신에게 진짜 목표가 있다면 누구도 그것을 막을 수 없다는 말로 이해했어요. 혹시 혐오적이거나 차별적인 말을 듣지 않았냐고 되물었을 때 그는 “뭐, 어쩌라고?”(So What)이라고 대답했어요. 생각해보면 저도 알게 모르게 그런 생각을 갖고 살았던 것 같아요. 뭐, 어쩌라고? 어쩌면 제게 직접적인 경험이 없어서 그런 것일지도 모르겠지만요.




연주를 하다가 폼을 잊거나 곡의 위치를 놓쳐서 헤맬 때도 있나요.


당연하죠. 그건 언제든 있을 수 있는 일이에요. 저도 놓치고 눈치를 볼 때가 있어요.




그런 기억을 하나 공유해준다면.


(웃음) 프레디 허버드와 함께했던 [Live At Fat Tuesday]에서 그랬죠. 당시에 저는 프레디의 밴드에서 일 년 반 정도를 있었어요. 그간 발라드곡을 연주할 때면 늘 ‘Body And Soul’이나 ‘God Bless The Child’를 연주했어요. 다른 발라드곡은 한 적이 없었죠. 그런데 그 공연에서 갑자기 ‘But Beautiful’을 연주하는 거예요. 얘기도 없이 그냥 시작했어요. 당시(1991년)에 저는 그 곡을 몰랐어요. 그때 우린 라이브 녹음을 진행하고 있었고, 저는 곡이 끝날 때까지 틀린 음만 치고 있었어요. 그때 정말 심장마비로 기절하는 줄 알았다고요. 그런데 프레디는 그걸 앨범에 그대로 실어버렸어요. (웃음)




베이스를 연주하는 젊은 친구들에게 조언을 해준다면.


근음을 치세요! 많은 베이시스트들은 Dm이라고 적힌 악보를 보고 D가 아닌 F를 치는데, 코드에 D가 적혀 있으면 그냥 D를 쳐요. 뭔가 다르게 보이려고 시도하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어차피 연주자 마다 다 달라요. 다른 베이시스트들과 뭔가 다르다는 것을 증명하려 노력하지 말고, 마음속에 있는 음악을 연주하라고 조언하고 싶습니다.




베이시스트들이 본인이 밴드리더일 때와 사이드맨일 때의 가져야 할 마음가짐이 있다면.


밴드의 콘셉트에 따라 다르겠지만, 본인의 밴드는 자신이 생각하는 밴드 콘셉트를 그대로 보여줄 수만 있다면 마음대로 원하는 것을 연주할 수 있습니다. 사이드맨으로 연주할 때는 다르죠. 예술적인 결정을 내리는 위치가 아니에요. 밴드리더에게 신임을 얻는 게 우선입니다.




요즘 주목하는 어린 연주자가 있나요.


정말 너무 많아요. 시카고 출신의 비브라포니스트 조 로스, 피아니스트 에메 코헨, 베이시스트 러셀 홀, 저와 함께 빌리지 뱅가드에서 함께하는 비브라포니스트 워렌 울프도 눈여겨봐야 할 연주자예요. 이들은 모두 20대 초반입니다. 앞으로 보여줄 음악이 정말 기대돼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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